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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등뼈

by 가슴뛰는삶혜경 2020. 7. 15.

천문학자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코스모스에는 오직 하나의 은하, 즉 우리 은하수 은하만 있다고 믿었다. 영국 더럼의 토머스 라이트라든가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의 이마누엘 칸트 같은 학자는 이미 18세기에 망원경을 통해서 세련된 나선 형태의 빛을 발하는 성운들을 밤하늘에서 알아보고, 이것들이 우리 은하와 같은 존재의 은하라는 예감을 가졌다. 칸트는 안드로메다자리에 보이는 M 31이 수많은 별도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은하일 것이라는 구체적 제안은 확실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나선형 성운에 "섬 우주"라는 멋들어진 이름까지 지어 줬다. 한편, 나선형 성운이 우리 은하 바깥에 멀리 떨어져 있는 섬 우주가 아니라, 은하수 은하 내부에서 중력 수축 중에 있는 성간운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발 더 나아가 중력 수축의 결과물로서 어쩌면 새로운 태양계들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었고, 이를 위해서 무척 밝은 새로운 부류의 변광성이 필요했다. 기준성의 광도가 높을수록 거리 측정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에드윈 허블이 1924년에 드디어 M 31 에서 그러한 변광성을 찾아냈다. 이러한 변광성들의 평균 겉보기 밝기와 원래 밝기를 비교하여, 그는 M 31 이 어림잡아 200만 광년은 조금 넘는 매우 먼 거리에 있다고 규명했다. 만일 M 31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다면, M 31의 실제 크기는 은하수 은하의 내부에서 볼 소 있는 성간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일 터였다.

그러므로 나선형 성운 M 31도 하나의 어엿한 은하였던 것이다. 하늘에는 훨씬 더 흐리게 보이는 성운들이 많이 널려 있다. 더 흐리다는 것은 더 멀래 떨어져 있음을 뜻한다. 코스모스의 광막한 어둠 속에는 1000억 개의 넘는 엄청난 수의 은하들이 널리 흩어져 있는 것이다.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코스모스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자 끓임없이 노력해 왔다. 인류라는 종의 유아기, 우리의 조상들이 조금은 게으른 듯이 하늘의 별들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던 바로 그 시기에도, 그리고 고대 그리스로 와서 이오니아의 과학자들의 시대에도, 어디 그뿐인가 현대에 들어와서도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이라는 질문에 꼼짝없이 사로 잡혀 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주 보잘것 없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행성은 따분할 정도로 그저 그런 별에 속해 있다. 그리고 태양이라는 이름의 그 별은 은하의 변방, 두 개의 나선 팔 사이에 잊혀진 듯이 버려져 있다.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라는 것도 뭐 그리 대단한 존재도 못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주의 후미진 구석을 차지하고 겨우 십여 개의 구성원을 거느린, 작은 은하군의 그저 그렇고 그런 '식구' 일 뿐이다. 그런데 그 우주에는 지구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의 은하들이 널려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우주적 관점을 갖게 되기까지 우리는 하늘을 보고 머릿속에서 모형을 구축해보고 그 모형에서 귀결되는 관측 현상들을 예측하고 예측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고 예측이 실제와 맞이 않을 경우 그 모형을 과감하게 버리면서 모형을 다듬어 왔다. 생각해보라. 태양은 벌겋게 달아오른 돌멩이였고 별들은 천상의 불꽃이었으며 은하수는 밤하늘의 등뼈였다. 이론적 모형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또 파기하는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용기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아르스타르코스 이래 과학자들의 임무는 우주 드라마의 중심 무대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한발씩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물러서기는 계속됐다.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물러서기는 계속됐다. 새로운 자리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섀플리와 허블의 발견들을 목격했던 세대들이 아직도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질 때마다 강등당하는 인류의 지위를 한탄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가슴과 가슴 깊숙한 곳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초점이며 지렛대의 받침목이기를 바라는 아쉬움이 아직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녕 코스모스와 겨루고자 한다면 먼저 겨룸의 상대인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 여태껏 인류가 멋모르고 부렸던 우주에서의 특권 의식에 먹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바깥세상이 어떤한지 알아내는 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우리의 행성 지구가 우주에서 중요한 존재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지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인류가 하나의 생명 종으로서 그 유년기부터 품어 왔던 질문을 가슴에 안고 우주 항해의 첫발을 내디딘 지 이미 오래됐다. 세데를 거듭할 때마다 유년기의 질문은 신선한 감각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왔으며, 세대를 거듭하면서 유년기의 호기심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 갔다. 별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탐험의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나그네로 시작했으며 나그네로 남아 있다. 인류는 우주의 해안에서 충분히 긴 시간을 꾸물대며 꿈을 키워 왔다. 이제야 비로소 별들을 향해 돛을 올릴 준비가 끝난 셈이다